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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신 검사 프로필, 조국 장관 부인 정경심 징역 구형 최후진술 전문 “사법시험 43회 연수원 34기 나이 학력 고향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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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신 검사 프로필, 조국 장관 부인 정경심 징역 구형 최후진술 전문 “사법시험 43회 연수원 34기 나이 학력 고향 경력”

정경심 교수의 최후진술 전문을 보다보니...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셨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굉장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최후진술 중 일부--------------

반면 제 남편은 저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이처럼 과외를 해서 집안을 돕는 저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지 학업을 희생하면서까지 과도하게 돈벌이에 열중하는 저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자격지심에 저는 결혼 전은 물론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과외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가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여 주말 부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부채를 다 청산한 이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가족을 위해서 저축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93년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고 실직하였고 석방되는 1994년 저와 딸아이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가정 경제의 운영은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1997년 IMF 위기로 시아버님 회사가 부도가 난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손 벌리지 않고도 알아서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저에게 그는 재산에 대해서 묻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왠지 모를 창피함에 과외 사실을 숨겼듯이 그 또한 왠지 모를 미안함을 묻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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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진술 전문-------------

[정경심 교수 최후 진술 전문]

장시간 재판을 진행하시면서 저와 제 변호인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허락하시고 이를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최후 진술을 하는 이 순간 무척 떨리고 힘듭니다.

2019년 8월부터 시작된 수사와 기소, 이어진 재판을 겪으면서 저의 심신이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기존의 기저질환에 더하여 어지럼증과 공황장애, 잦은 실신으로 정신과적 치료가 추가되었고, 급기야는 몇 번의 낙상으로 디스크가 탈출하는 처지까지 와서 두 번의 수술을 하였습니다.

마비 증세를 오랫동안 방치하여 자칫 영구장애를 입을 뻔하였고 두 번에 걸친 수술을 하였지만 회복은 더디고 장기간의 재활 치료를 요하며 완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 최후 진술도 통증을 견디려 병실 침대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원 안에서 코로나에 확진되어 일주일째 격리되었다가 어제 비로소 격리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고통은 정신적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3년여 간 자식들을 포함한 전 가족이 수사 대상이 되고, 공직에 임명된 배우자가 사퇴하고, 이어 기소까지 되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떨립니다.

"남편의 모든 혐의, 다 내 영역에서 벌어진 것"

올해 초에 저희 별건 재판이 마무리되면서 4년의 중형이 확정되었고 이 여파로 딸아이의 입학이 취소되는 극한의 참담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제 저와 제 남편이 공범으로 기소된 본 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공소 사실에 대해서는 변호인께서 상세히 설명을 하였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자리에서 공소사실 자체를 하나하나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공소사실에 드러나지 않고 재판이라는 제도의 한계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건의 맥락과 그 속에서의 저의 진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 재판 내내 저를 가장 힘들고 아프게 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입시 비리 혐의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공직자 재산 신고 및 증거은닉 교사 부분이었습니다.

입시 비리 공방을 하는 동안 학교 폭력을 심하게 당했던 아들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그 아픔과 상처를 되살릴 수밖에 없었기에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습니다.

또 공직자 재산 신고와 증거은닉 교사가 관련된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영역에서 이루어졌으니 맞아도 제가 오롯이 맞아야 하는데 얼토당토 않게 남편이 공범으로 기소되었기에 저는 재판 내내 남편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가정을 이루면 좋은 엄마 좋은 아내를 소망합니다. 저 또한 그런 소망으로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저의 재판을 통해 딸아이 삶을 망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쩌면 남편과 아들의 삶까지 망쳐버릴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천하의 나쁜 아내에 엄마구나, 그런 자괴감에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계신다면 제 아들과 남편이 결백했다는 점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으며 당시에 사정을 진솔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혼 전 친정 생활, 결혼 후 가정경제 본인이 도맡아"

먼저 공직자 재산 신고와 관련하여 피치 못하게 저희의 개인사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2016년 저와 남동생 그리고 오빠 간의 상속재산 분할 분쟁에서 확인이 되었듯이 저는 친정에 소위 소녀 가장 역할을 대학생 때부터 해왔습니다. 대학교 1학년 여름에 부친의 사업이 도산한 이후 집안을 일으키고 생활비를 조달한 이는 저와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영문학을 전공하다 보니 영어 과외를 하게 되었고 제 동생은 낮에는 탁구장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저를 과외 장소로 이동시키는 것을 도와 하루에 두세 번의 과외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생은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반면 제 남편은 저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이처럼 과외를 해서 집안을 돕는 저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지 학업을 희생하면서까지 과도하게 돈벌이에 열중하는 저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자격지심에 저는 결혼 전은 물론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과외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가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여 주말 부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부채를 다 청산한 이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가족을 위해서 저축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93년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고 실직하였고 석방되는 1994년 저와 딸아이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가정 경제의 운영은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1997년 IMF 위기로 시아버님 회사가 부도가 난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손 벌리지 않고도 알아서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저에게 그는 재산에 대해서 묻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왠지 모를 창피함에 과외 사실을 숨겼듯이 그 또한 왠지 모를 미안함을 묻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재산 모은 뒤 투자 병행...남편은 주식 전혀 몰라"

일정한 재산이 모이자 저는 투자를 병행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에 주식을 주 투자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제 남편 조국은 주식을 매매한 사실이 없습니다. 주식 매매 프로그램인 HTS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주식 객장에 나가본 적도 증권회사 직원과 매매 상담을 하거나 주문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근무처에 있는 농협과 신한은행에서 조금씩 예금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된 증권 계좌는 제가 차명으로 운영하는 것이고 기타 금융권의 계좌들은 5천만 원 한도의 예금 보호 조치 때문에 제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예치한 돈입니다. 2017년에 민정수석이 되어 재산 공개를 하게 되었을 때 제가 확인해 보니 철저하게 자신이 벌어간 그의 예금 총액은 약 4천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이 점은 검찰이 제출한 저희 문자 내용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세세한 내용 파악할 경황 없었던 2017년 재산공개"

이런 남편이 저의 재산 규모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17년 8월경입니다. 민정수석 인사 검증 차 이미 5월에 재산 내역을 청와대에 제출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하루 이틀 사이에 수십 페이지의 서류를 작성해야 해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것으로 압니다. 사정상 급히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그가 먼저 작성하고 제게 넘겨주면서 공란인 부분만을 작성하라고 했기에 저희는 각자 자기 부분만 작성 수합하여 넘겼습니다.

남편은 당시에 문재인 정권의 초대 민정수석 지명과 관련하여 준비할 것과 처리해야 할 일들로 정신없이 바빠 본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부분을 체크할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영역은 각자가 제대로 작성하리라는 정도의 신뢰는 저희 부부 간에 형성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민정수석 임명 후 역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그 해 7월 31일자 정식 재산등록과 공개, 8월 초 언론의 대서특필을 통해서 제 남편은 비로소 제 재산의 규모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가정 경제를 하나하나 공유하지 않고 제가 전적으로 운영하게 된 것은 신혼 때부터 제 수입이 남편의 수입보다 많았던 점, 제가 남편보다 수리에 밝아 재정의 수입 지출을 책임졌던 점, 제가 이재에 관심이 있어 여윳돈을 묵혀두지 않고 투자를 즐겼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기본생활 외 돈 버는 일에 관심 없어"

반면 남편은 매달 수령하는 월급으로 기본적인 생활비와 자신의 경비를 충당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추가의 돈을 더 버는 일이나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등 남들이 다 관심을 가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 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인 일 정치적인 일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이 때문에 속칭 돈 되지 않는 일이 늘 저보다 훨씬 더 바빴습니다. 저는 그런 그에게 섭섭하였고 가끔은 경제적 무능력자라고 놀렸지만 동시에 존경하였습니다.

2017년 8월 초 민정수석의 재산이 공개되었을 때 제일 놀란 것은 물론 제 남편이고 그다음으로 시어머니와 저희 두 아이였습니다. 당시에 제가 시어머니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에도 이 사실이 잘 나와 있습니다.

2017년 재산 공개 이후에도 제 남편이 저의 경제 활동에 관여하거나 제가 이를 남편에게 보고한 일은 없습니다. 2018년 2월의 녹취록 조범동 정광보 저 사이의 녹취록에서 드러나듯이 제 남편은 제가 동생을 조범동에게 소개하여 함께 투자한 사실도 전혀 몰랐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그는 그의 영역에서 저는 저의 영역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2019년 본 사태가 터지면서 사모펀드가 공격을 받았을 때 그때야 비로소 남편은 제가 사모펀드라는 것에 가입했고 조범동이 소개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 외 기타 소소한 투자에 대해 그가 전혀 알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책임지는 영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가지고 남편이 공범으로 기소되었으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아들 학폭 회복 위해 방학 때마다 동양대에서 함께 생활"

다음으로 아들의 입시 비리 혐의와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012년 초 저는 아들이 한영외고에 입학한 이후 약 1년간 지속적인 학교 폭력에 시달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피해자 7~8명의 학부형과 함께 공동으로 학교에 가해자 징계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제 아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아들의 성적은 2012년 봄을 기해 올A에서 올F로 수직 낙하했습니다. 엄마가 지방대에서 교수를 하며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 동양대학교에 사표를 낼 것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남편이 극구 말려서 사표를 제출하지는 않았으나 저의 죄의식과 자책감은 이때부터 아들을 직접 챙기도록 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아들을 동양대에 데려다 놓고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며 제가 하지 못할 때는 남편에게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원의 2013년 여름방학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에서의 인턴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학폭에 시달린 자식을 방학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그냥 놀리겠습니까. 그 아이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최대한 지원하는 한편, 외국대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이니 이에 맞는 시험 준비와 스펙을 준비시키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일입니다.

저는 이 법정에서 지막심 교수가 한 증언에서 드러나듯이 헬스를 중점적으로 도와주는 멘토링을 통해 아들의 심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갖고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제 아들과 한 시간 아니 10분만 앉아서 말을 해보시면 이 아이는 얼마나 예의 바른지 얼마나 어른의 말을 존중하며 최대한 따르려는 착한 아이인지 바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은 엄마가 시키는 동양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극 도움도 주고 지역 어른들이 봉사활동을 소개하면 거기에도 참여하면서 방학을 보냈습니다.


"유학 가서도 학폭 트라우마 못 벗어나"

그런데 아들을 조지워싱턴 대학교로 보내면서 그 애가 학폭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들을 멀리 타국에 외롭게 보내다 보니 제가 과잉보호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학폭 피해자라는 사실 앞에 교육자로서의 엄정함이나 객관성보다는 엄마로서의 무조건적인 모성애와 보상 심리가 앞섰습니다.

대인관계를 기피하여 대학 공부의 핵심인 스터디그룹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재학 내내 저 스스로가 세미나 원이 되고자 했던 것이 2016년 11월과 12월에 실시된 집에서 치는 온라인 퀴즈를 돕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냥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말만 믿고 도왔던 것인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경솔했습니다.

지도교수의 지침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불찰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죄송하고 반성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일을 자신이 해야지 하면서 비협조적인 남편을 굳이 끌어들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과목도 아니고 굳이 민주주의에 관한 과목에 남편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가 그 분야에서 남달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실제 해보니 별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을 아들이 알아서 하게 하자는 그에게 굳이 화를 내면서까지 참여하게 한 저는 몇 번이고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남편에게도 미안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맹목적인 모성애로 남편 대대적 망신 당하고 기소돼"

남편이 이 온라인 퀴즈에서 한 일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집중적으로 풀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세미나원이고자 했던 조원이나 저처럼 텍스트를 읽지도 강의 노트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업무에 바빠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막상 퀴즈의 내용은 강의와 매 시간 읽기 과제에 대한 것이라서 강의 노트는커녕 텍스트를 읽지도 않은 남편이나, 텍스트를 읽었지만 강의를 들은 바 없는 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워낙 예의 바르다 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감사하다고 하였으나 실제 아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검사님들께서 언급하셨듯이 소위 갑론을박을 통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해답을 구별해냈던 11월 퀴즈에서는 고득점을 올렸는데 12월 퀴즈에서는 컴퓨터 오류로 인해 6점이라는 최하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의 실체도 잘 모르고 그저 맹목적인 모성애로 달려든 저의 경솔함으로 인해서 아들과 남편이 언론에 의해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고 심지어 기소까지 되었으니 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교육자로서 저는 이러한 제게 실망하셨을 많은 국민께도 참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으로 전후 좌우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점 다시 한번 더 깊이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그러나 이는 퀴즈의 성격에 대한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민주주의 과목 교수님을 속이려거나 그의 교육적 취지를 방해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어도 30여 년을 강단에 서왔는데 어찌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 남편과 아들을 그러한 일에 가담케 하겠습니까. 아들은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공동 시험이 가능한 줄 알았던 것이고 그 말을 들은 저나 남편은 별 생각 없이 참여한 것입니다.


"컴 하드 교체는 자료 백업 위했던 것"

마지막으로 증거인멸 교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편이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2019년 8월 9일경 저는 부산의 시어머니와 남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남도 여행을 하던 중 14일 무렵 시모를 위해 임대한 우성빌라의 임대차계약서 상의 임차인이 뒤바뀌었다고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이후에 아이들 입시 비리 보도가 나오더니 사모펀드 뉴스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청문준비단에서 정관과 분기별 보고서를 달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적절한 해명과 대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저는 8월 27일자로 상경하였습니다. SRT역에 저를 픽업하러 온 김경록과 함께 집으로 가서 사모펀드 전반과 분기보고서를 건네주며 좀 읽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전국에 70여 곳이 압수수색을 당한 터라 남편은 변호인을 선임하라고 했고,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한 변호사를 소개받아 8월 28일 오후에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수임 계약을 하였습니다.

2019년 8월 28일 당일 사모펀드 관련 대책을 변호인과 의논하면서 김경록을 불러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마치고 집에 왔는데 변호사 사무실을 먼저 떠난 김경록이 전날 준 사모펀드 서류를 가지고 집에 들렀기에 거실에 앉아서 한참 설명을 들었습니다.

김경록이 오기 전에 저는 컴퓨터 안에 자료를 좀 백업받고 싶어서 컴퓨터의 하드를 뺏으려고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새벽부터 심야까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집을 떠나 제 딴에는 자료를 완전히 확보하여 유리한 점을 찾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사모펀드 이야기를 마치고 제가 김경록에게 컴퓨터 하드 분리를 처음 한다고 하니 김경록이 도와주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교체할 새 하드를 구입하도록 제 신용카드를 김경록에게 주었는데 제게 뭔가를 은닉하고 이를 감쪽같이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굳이 제 신용카드를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김경록이 저의 컴퓨터를 분해하는 동안 조OO(전 동서)과 전화를 하면서 이 사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김경록이 작업하는 동안 남편 조국이 귀가하였지만 입구에서 간단한 인사만 하더니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당시 사모펀드 건으로 남편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한 상황이었는데 전화기를 쥔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 뭔가 또 터졌구나 하는 직감을 하고 그가 전화를 끊고 나올 때까지 조용히 방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김경록도 돌아갔습니다. 새로운 하드를 설치하여 사용에 지장이 없게 해두고 저희 집을 떠났습니다.

"하드 교체, 컴 본체 이동... 남편과 아무 관계없어"

그뿐이었습니다. 컴퓨터의 하드 교체에 대해서는 남편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도 저도 밀어닥치는 뉴스에 대응하느라 정말 시간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틀 후 저는 개강이 코앞인데 연구실에 들러 필요한 자료도 백업받고 교재가 준비되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많이 지쳐 있던 터라 김명록에게 동양대까지만 운전을 부탁하였고 다소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연구실 컴퓨터를 살펴보았습니다. 문서 용량이 생각보다 커서 이동식 장치에 다운받기에는 무리라 판단하고 본체를 서울로 가져가게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방배동 서재에서 컴퓨터를 분리하는 작업과 동양대에서 연구실 컴퓨터 본체를 들고 가는 작업 그 어디에도 남편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저와 김경록 사이에 벌어진 일로서 남편이 어느 시점에도 개입한 적이 없는데 그는 증거은닉 교사의 공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티끌조차 개입하지 않은 남편이 기소되자 저는 절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기소되어 고초를 겪은 김경록과 남편을 보면서 제가 좀 더 법을 알고 현명하게 대처하였더라면 하는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이 부분에서 조국을 공범으로 기소한 것은 공직자윤리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죄를 묻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부께서 잘 살펴봐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법 이외 영역에서 큰 과오 범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지난 2년 4개월의 수감 생활에 대한 소회를 간략히 말씀드리며 최후 진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제 이마에는 낙인이 깊게 새겨졌습니다. 처음에는 지은 죄가 얼마나 크기에 4년의 징역형을 받았는가 하며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조망 넘어 낮고 낮은 감옥의 독방 안에서 저는 제 삶을 찬찬이 돌아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방 안의 모든 수용자가 하나같이 억울함을 주장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처절한 시간이 참 아득해서 입밖에 내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싫었던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문득 어떤 깨달음이 제게로 왔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법을 떠나 결코 기소할 수 없는 영역에서 저는 늘 더 큰 과오를 범하며 살아왔던 것 아닐까. 그러니 억울하다 말고 최선을 다해 새롭게 살아내보자. 한 가족 전체가 전례 없는 고난의 시간 속에 갇히게 되는 이 기막힌 현실에서 우리 가족 모두의 생명을 지켜준 사랑의 힘에 감사하며 살아가고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내기만 한다면 희망은 있을 테니까.

그러나 희망이 되어 삶을 붙잡으려는 순간마다 굳이 이러고 살아야 하나, 가족이 모두 망해버렸는데,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는데, 살아갈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듭니다. 하루하루를 절망과 모욕 속에서 근근이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수형 생활 교훈 간직하고 반성하며 살아갈 것"

올해 6월 디스크 파열을 겪고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즉각 응급실을 찾지 않은 데는 이러한 절망과 포기심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병원을 찾아 기를 쓰고 몸을 붙이는 게 무슨 의미지 하는 생각, 막상 형 집행 정지를 받아 두 번의 전신 마취에서 깨어날 때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척추 수술은 정말 아픈 수술입니다. 수술도 아프지만 회복 과정에서도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저희 병원 생활은 통증과 재활의 싸움이었는데 무통 주사와 진통제 부작용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멉니다. 그래도 많이 왔지 않냐고들 위로합니다. 제가 끝이 없어 보이는 이 길을 걸으며 버티는 것은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과 지금까지 사랑해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 때문입니다. 진정 낮은 것이 무엇지를 가르쳐준 2년 4개월 수형 생활의 교훈을 더 속 깊이 간직하고 반성하며 살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동안 시원치 않은 건강으로 인하여 재판에 많은 방해가 되었던 점을 최대한 배려해 주신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 오랜 시간 저와 변호인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주신 점에도 깊은 감사와 경의를 포함합니다.
출처 - https://www.ddanzi.com/free/756713302

 

자유게시판 - 정경심 교수의 최후진술 전문을 보다보니...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셨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굉장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최후진술 중 일부--------------   반면 제 남편은 저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이처럼

www.ddanzi.com

 

정경심 징역 구형

검찰 측 최후변론은 강백신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3부 부장검사가 이끌었다. 강 검사는 3년 전 조 전 장관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창원지검 통영지청으로 발령받은 바 있다.
강백신 검사 프로필 
출생 1973년, 경상남도 남해군
소속 서울중앙지방검찰청반부패수사3부 부장검사
시험정보 사43회 연34기
생년월일 1973.09.28
학력 서울대학교 인류학 학사
진주동명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류학 / 학사)
현직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반부패수사3부 부장검사
직책 제43회 사법시험 합격
제34기 사법연수원 수료
인천지방검찰청 검사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울산지방검찰청 검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파견검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형사1부 부장검사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공판부 부장검사
2022. 11. 18. 정경심이 아들입시비리혐의로 기소된 공판에서 "위법, 부당한 방법으로 교육 대물림을 시도한 범행이고, 공정한 교육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노력을 믿었던 평범한 학생들을 좌절에 빠뜨린 중대범죄" 라며 징역2년을 구형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강백신 검사 프로필, 조국 장관 부인 정경심 징역 구형 최후진술 전문 사법시험 43회 연수원 34기 나이 학력 고향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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